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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대한 단상

이지은 | 2007.11.26 11:35 | 조회 1792


내가 담배를 처음 맛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러니까 여고 1학년 그 가을 무렵으로 기억된다.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몰래 학교를 빠져 나와
친구들과 한바탕 깔깔거리며 시내를 쏘다녔던 날.
골목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가로등불이 전부였던
초등학교 운동장 으쓱한 벤치에 여섯명 나란히 앉아
멋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담배를 태웠었다.
(그 당시 터미널 근처에 담배 자판기가 있었는데 700원인가 600원인가를 넣고 88 한 갑을 샀던 기억이 난다.)
제법 '잘 나간다'는 언니들은 죄 담배를 피우던 시절
맛이 좋나 폼이 나나 어쨌거나 호기심에 한 개피 피워 물어봤더니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기침은 콜록콜록 어찌나 해댔던지
나중엔 구역질이 나서 모두 한참동안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먹어서 취하지도 배가 부르지도 않은 담배는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며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을 들어가고 한창 술과 남자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간혹 담배피는 남자가 멋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아무데서나 연기를 뿜어대며 오도방정으로 급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남자는 됐고
재가 떨어질까 말까 길게 붙어있는 동안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고 앉았는 남자를 보면
(물론 지금이야 어따 정신 팔고 앉아서 재 떨어지는 줄 모르고 저러구 있나 싶어 재떨이를 던져주고 싶기도 하지만)
그땐 어째 괜히 분위기 있어 보이면서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담배가 다 다토록 저 먼 델 보고 있을까,
참 오지랖 넓은 신경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담배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내가 아주 어릴적, 아홉살 쯤 됐을까.
울 아부지 백이십오 오토바이에 다섯 식구를 모두 싣고 씽씽 달리셨던 그 때.
막내는 운전하시는 아부지 앞 기름통 위에 앉히고
꽉 잡아야 된다 지은아, 단풍같이 작은 손으로 울 아부지 허리춤을 야무지게 잡고 앉으면
뒤로 남동생과 엄마가 앉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훌렁 뒤로 다 넘어가도록 달리는 중에도
꾸벅꾸벅 졸고있는 여동생에게 아버지는 늘 노래를 주문했고
그러면 울 아부지 금쪽같은 막냉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틀림없는 18번, 주현미의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참 잘도 불렀었다.
아이고 잘한다 우리 딸래미,
바람결에 들려오는 울 아부지 커다란 웃음소리에 묻어나던
따듯한 울 아부지 등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늘 나던
아버지 생각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로 그 냄새,
나는 그 담배냄새를 좋아했다.


꼭 같은 담배를 태워도
울 아부지한테서 나는 담배냄새는 구수했다.
이제는 손도 나이가 들어 어느만큼의 세월이 느껴져 애틋하기도 하지만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낀 아버지의 손은 여전히 멋이 있고 근사하다.
올 봄 건강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고난 후로
담배를 끊어보겠다, 얼마나 갈 지 알 수 없는 다짐을 또 하셨지만
그래도 때때로 아버지 그리운 날은
그 구수한 담배냄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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